기독교 자체에 억한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기독교는 내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에서 성당이나 교회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굳이 교회 안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고 들어가 본 적도 없었다.
처음 그러니까 대학 신입생 시절에 도를 믿냐는 분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 싫었다. 교회를 다닌다는 분들이 보이는 명백한 도덕적 타락은 종교에 대한 환멸을 키웠다. 그런데 교회에 의지하는 사람이 늘어만 가는 것 같았다. 당혹스러웠다.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들 그리고 많은 교수들이 기독교를 믿는다. 종교를 믿는 방식이 한 가지만은 아니겠으나 중세 유럽도 아닌 요즘 비과학적 논리라도 성경에 있으면 그대로 믿어버린다는 학자들을 보면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언제부터인가 기독교는 나에게 두통거리가 되었다.
2006년 코엑스에서 있었던 도서전에서 멋모르고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 (1927 – 2001)]의 3부작 도서를 샀다.
책 속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예수가 그 당시 존재했던 수많은 비슷한 존재 중 하나인데 다만 추후에 기독교에서 '선택'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여 충격을 받은 바 있다.
서두가 너무 길어질 염려가 있어 올해 SBS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 시리즈로 뛰어넘어야겠다.
1편에서 기독교가 이전에 존재했던 종교, 다른 종교들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소개했다. 꽤 흥미가 생겨 도서관에서 빌려보려 했으나 나와 마찬가지로 방송을 보고 책을 대출한 사람이 있어서 며칠 전에 빌릴 수 있었다. 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고, 지금도 사고 싶은데 절판이란다. 한기총의 요구로. 대신 pdf파일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아직 1/3도 못 본 상황인데 지금까지 논의를 보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다큐 비슷한 동영상이다. 9/11에 대해서는 "루스 체인지(Loose Change)"를 거의 베꼈다는 평을 많이 봤는데, 제일 앞의 기독교 비판 부분은 바로 이 책 "예수는 신화다"의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제작자가 인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출처 정도는 밝혀주는 양심이 있기를 바란다. 이 책 내용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책의 앞 부분은 시대정신에 나온 대로, 나같이 처음 보는 사람은 충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성경의 예수가 오시리스, 미트라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등등의 인물들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베꼈는데, 나중에 기독교측에서 다른 유사한 존재들은 악마의 소행이라고 치부해버렸다는 것이다.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예수의 생일이 된 이유, 결국 예수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 숫양자리=>물고기자리=>물병자리로 옮겨가는 큰 한 달(A Great Month)과 종교의 관계 등은 책으로 다시 봐도 참으로 흥미롭다.
이 책의 핵심은 미스테리아라고 하는 영지주의적 전통을 기독교가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는 자신의 근원을 일부러 거부했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미스테리아라는 것은 처음 보는 개념인데 역사적 흐름은 꽤 단순해보인다.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에서 시작하여,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로 이어지며, 책에서는 이를 '오시리스-디오니소스'라는 신인(神人)으로 표현하고 있다.
방금 읽은 일신교와 다신교의 유사함에 대한 부분도 꽤 인상적이다. 특히 예수가 그렇지만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꽤나 유치한 상상력이다. 오히려 보이지 않고, 형체를 알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악마와 천사가 난무하는 기독교는 결코 유일신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은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다신교라 비난하는데 오히려 그 다신교가 진정한 일신교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신은 하나라고 생각하며, 신들(gods)은 유일한 신의 다양한 측면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신교와 다신교가 생각만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니 깊이 있는 분석글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고, 터무니없는 흠잡기로 일관한 기독교인들의 글은 여럿 봤다. 책의 내용은 제대로 소화하지도 않고(그럴 생각이 전혀 없으시겠지만) 그렇게 길게 거짓말로 비난하는 정력에 찬사를 보낼 뿐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떠받들 생각은 없다. 한글 번역판은 일부러 주석을 많이 생략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들의 주장의 근거가 빈약해보이는 부분이 많다. 영어 원서를 보면 해결된 문제지만.
결국 미스테리아와 기독교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인데, 소크라테스, 플라톤도 일원이었던 미스테리아의 전통이 기독교에 이어진다면 기독교가 폭력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지웠더라도 현재 기독교에서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의 기독교모습 그대로로는 한계가 있겠다. 신이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질 것인가. 공존하며 도덕적으로 살자는 것이 종교의 핵심인데, 그렇지 않고 양심의 가책의 도피처로 종교를 이용하여 파괴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 문제다.
인터넷에서 본 글에서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비판하기 위해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의 내용을 많이 차용했는데, 책에서도 종종 "황금 가지" 내용을 인용하고 있어 추후에 "황금 가지"까지 읽어봐야겠다 싶다.
- p.70 동방박사 = 마기(Magi). 에반게리온의 마기가 이 마기렸다.
----------------------
예수는 신화다 2부,
전반부는 '시대정신'과 유사한 부분이 많아서인지 꽤 집중해봤는데 뒤로 갈수록 지루해져서 대강 보고 말았다. 하지만 예수가 실존했는가, 로마가 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는가, 유대인 민족의 종교가 어떻게 세계의 종교가 되었는가, 문자주의가 영지주의를 이긴 이유 등에 대한 부분은 모두 중요한 논의들이었다.
책 맨 끝에 곽노순 '목사'(!)가 쓴 추천의 글이 달려있다. 추천의 글이 추천할 책을 이토록 비꼬는 것도 처음인 듯 하다. 하여간 곽 목사는 작금의 "맹신주의로 치닫고 있는 기독교"의 균형을 잡기 위해 또 다른 극단인 이 책이 균형감각을 잡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한다.
이 분의 추천의 글도 인터넷에 떠도는 기독교인들의 글들처럼 결국 비판하기 편리한 부분만 따와서 비판했기에 100% 공감하긴 어렵다.
추천의 글이 아니라도 책을 읽는 내내 책의 깔끔한 논리에 꺼림칙함을 느꼈다. 역시 원서를 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들고,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싶기도 하다. 곽 목사 말대로 피타고라스 이야기만 사실이고 예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말이 안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 전체의 맥락에서는 저자들 주장이 말이 된다. 가장 경계하고 싶은 것은 저자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문서들의 신빙성이다. 이 책은 명백히 대중을 대상으로 작성된 것이기에 출처가 애매할 수 있다. 근거가 되는 문서는 고대의 다양한 언어로 작성된 것인데 저자들은 그 글들을 제대로 소화했을까? 책 뒤에 참고하라고 써둔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영어로 번역된 자료들만 본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큰 약점이 이 책에 있을 수 있지만 이 책의 논지와 논리에 모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꼭 영지주의가 아니라도 종교가 개인의 정신적 고양에 이바지하면 되지 그걸 왜 타인에게 강요하고, 협박하고, 죽이는가. 저 세상의 안락을 담보로 한 순교라는 무시무시한 사고 방식은 종교재판의 피의 제전으로 이어진다. 결국 니체의 말대로 약자인 유대인의 무서운 복수심이 2천년 동안 인간의 정신을 좀먹었는지도 모른다. 저자 말대로 역설적이게도 기독교를 설파한 것은 유대인을 탄압한 로마 제국이었지만.
다양성의 배제, 권력에 영합. 물론 기독교만 이런 문제를 내포한 종교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진실이고 믿음에 자신이 있다면 큰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는 상식이 통했으면 좋겠다. 이 책이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순 거짓말이라도 그냥 놔두면 어떤가. 출판 금지조치라는 섣부른 입막음은 기독교의 약점을 더 크게 드러내고, 이 책의 가치를 더 높일 뿐인데.
몇 가지 참고할 내용을 적어둔다.
pp.36-37
이토록 거대한 은폐 행위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은 유세비우스(AD263-339)라는 인물이다. 그는 AD 4세기 초에 전설을 수집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이고 날조해서,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를 집필했다. 이후의 모든 역사는 유세비우스의 의심스러운 주장을 토대로 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인용할 다른 정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죄다 이단자로 낙인찍혀서 제거되었다. 이런 식으로 4세기에 편집된 거짓 문서가 우리에게 확고한 진실로 내려왔다.
유세비우스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재위306-337)에게 고용되었다. 이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자에게 권력을 부여해서 이교도와 영지주의자들을 말살하게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주장인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하나의 신, 하나의 종교'를 원했다. 그는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신조인 니케아 신경(信經)을 만들게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이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은 제국에서 추방되거나 침묵해야 했다.
로마 제국의 재건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 '그리스도교인' 황제는 니케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아내를 목졸라 죽였고, 아들을 살해했다. 그는 임종할 때까지 일부러 세례를 받지 않았다. 잔혹한 행위를 계속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천국의 자리를 보장받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교회 박사'인 유세비우스로 하여금 아첨으로 가득한 자기 전기를 쓰게 해서 자신을 미화시켰지만, 사실상 그는 앞서의 로마 황제와 똑같은 괴물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역사'가 로마인 폭군에게 고용된 한 사람이 지어낸 것이고, 그것이 온통 거짓말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정말이지 놀라운 일 아닌가?
pp.156-157
그리스도교인들은 오직 한 인간만이 말 그대로 육신이 된 로고스였다고 믿는다. 그것이 고대세계의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인을 나누는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교도인들에게는 우리 모두가 공요한 로고스가 단 하나의 인간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리스도교인의 로고스 개념이 이웃 이교도의 개념과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사렛의 한 목수가 실제로 로고스의 화신이며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러한 주장이 정말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 수세기 동안 논란을 거듭했다.
p.160
신약 성서는 정말 새로운 것이었을까? 전통 유대인들에게는 분명 새로웠고 이단적이었다. 예수의 비유를 통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유대인 교리는 소크라테스의 '적을 사랑하라'는 교리의 도전을 받았다. 천국과 지옥의 성격에 대한 미스테리아의 가르침은 내세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을 뒤바꿔 놓았다. ... 이교도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그런 교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 과거 이교 신앙의 가르침과 똑같았어도 이교도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독창적인 진리보다는 항구적인 진리를 원했기 때문이다.
pp.184-185
그런데 자기 자신이란 무엇일까? 이교도 현자들은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할 낮은 수준의 자아인 에이돌론eidolon과 높은 수준의 자아인 불멸의 다이몬Daimon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에이돌론은 육체적 자아이고, 몸뚱이이며, 한 개인이다. 다이몬은 영혼이며, 누구나 하나님과 영적으로 이어진 참된 자아이다. 에이돌론은 거짓 자아이며, 불멸의 다이몬이야말로 자신의 참된 정체성임을 입문자가 깨닫도록 돕는 것이 바로 미스테리아 의식이었다.
에이돌론의 관점에서는 다이몬이 한 개인의 수호천사로 보인다. 아직 에이돌론과 동일시되는 입문자는 다이몬을 자신의 참된 자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목적지로 자기를 인도하는 영적 안내자라고만 생각한다. ~
p.257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복음서들은 원래 그런 이름으로 알려진 게 아니었다. 원래는 특정한 저자가 없었던 것이다. 각 복음서는 각 그리스도교 분파의 '가르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다 후대에 가상의 저자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복음서들은 사실상 익명의 작품이다. 복음서 안의 모든 내용은 예외 없이 대문자로 씌어져 있고, 제목이 없으며, 장이나 절의 구분도 없고, 실제로 낱말들 사이에 구두점이 없다. 성서는 유대인의 아람아로 씌어지지 않았으며, 오직 그리스어로만 씌어졌다.
복음서는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용이 바뀌었고 덧붙여졌다. 이교도 비평가 켈수스는 그리스드교인들이 '내용을 비판하는 주장들을 무마할 목적으로 서너 번, 혹은 그 이상 원래의 내용을 바꾸었다'고 지적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밝혀 냈다. 3천여 종의 초기 원고를 세심하게 연구한 결과, 기록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드러난 것이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는 3세기의 저술에서, 변해 가는 신학적 풍토의 요구에 발맞추기 위해 원고가 편집되고 보완 개편되어 왔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책에서 중요하게 다룬 '나귀를 탄 디오니소스'. 하지만 구글엔 사자를 탄 모습이 더 많이 검색된다.
흔한 그림은 당나귀를 탄 헤파이스토스 옆에 있는 디오니소스의 묘사다. 어떤 그림에선 디오니소스가 낙타를 탔는데, 옆에 부연설명으로 보통은 나귀를 탄다고 되어 있긴 하다. 니체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부각하여 비교하긴 했지만, 종교학적으로도 이렇게 중요한 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