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종교, 철학, 역사를 넘나들며 창조론의 이론적 모순과 잘못된 믿음이 가져온 결과를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또한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신으로 인해 무너졌다.
신이 사라진 이후의 사회가 오히려 더 희망적이다.
신에 대한 부정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고, 미래 사회의 대안은 종교가 아닌 인간 그 자체에 있다.
리처드 도킨스. 1941년 케냐生. 옥스퍼드大卒.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동물행동학자. 저술가.
영국 옥스퍼드大 교수. 창조주의와 지적 설계론에 대한 가장 확고하고 단호한 비판가.
저서,
[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 (1976),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 (1982),
[에덴 밖의 강(River Out of Eden)] (1995),
[불가능의 산을 오르다 (Climbing Mountain Improbable)] (1996),
[무지개 해체하기 (Unweaving the Rainbow)] (1999),
[악마의 목사 (A Devil's Chaplain)] (2003).
;;들어가는 글;;
어린 시절 아내는 학교를 몹시 싫어해서 차라리 퇴학당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20대가 되었을 때 아내는 그 사실을 장모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왜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니?" 아내의 대답이 바로 이 글을 쓴 동기가 되었다. "그래도 되는 줄 몰랐어요."
인간은 균형이 잡힌, 행복하고, 도덕적이고, 지적인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
현재 미국의 광적인 신앙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미국에서 종교에 대한 농담을 하는 것은 재향군인회관에서 국기를 불태우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망상(delusion)은 잘못된 믿음이나 인상을 말한다.
모순되는 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하는 것, 특히 정신장애의 한 증상이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When one person suffers from a delusion, it is called insanity. When many people suffer from a delusion it is called a Religion.
- 로버트 퍼시그, Robert Maynard Pirsig -
독특한 신앙인은 논증에 면역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다윈주의는 자신보다 더 고등한 권능자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망상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다.
01.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
아인슈타인은 종종 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런 유명 과학자가 자신들의 편이기를 너무나 바라는 초자연주의자들의 오해를 자초하곤 했다.
우리가 무지개의 신비를 푼다고 해도, 그 경이감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레임,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
아인슈타인, Einstein 의 말이 흔히 인용되지만,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명확히 표현해왔다."
"당신이 이 나라 국민의 신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의 원래 나라로 돌아가세요... 당신의 미친 진화론을 들고 독일로 당장 돌아가든지, 아니면 압박에 못 이겨 독일을 떠나 올 때 기꺼이 당신을 환영해 준 사람들의 신앙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당장 그만두시오."
- 오클라호마 골고다 교회 창시자. City of Wichita, Oklahoma
유신론자 - 초자연적 지성을 믿는다.
이신론자 - 초자연적 지성을 믿지만, 그 지성이 우주의 지배법칙 설정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범신론자 - 초자연적인 신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을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신론은 물을 타서 약하게 만든 유신론이다.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신이라는 말이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 법칙들을 의미한다면, 그런 의미의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신은 정서적인 만족을 주지 않는다. 중력 법칙을 향해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리학자들의 비유적 또는 범신론적 신은 성서에 나오는 인격신과 거리가 멀다.
사제, 이맘, 랍비가 말하는 인간사에 간섭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우리의 생각을 읽고 죄를 벌하고 기도에 답하는 신과 아득히 멀다.
물리학자들의 범신론적 신과 인격신을 일부러 혼동시키는 것은 지적인 반역 행위다.
신앙이 모욕에 몹시 취약하므로 인간을 대할 때보다 훨씬 높고 훨씬 두꺼운 존경의 벽을 쌓아 보호해야 한다.
“Religion is having sacred or sacred beliefs,,, Douglas Noel Adams,
"종교는 신성하거나 성스러운 개념을 중심에 놓고 있다. 그 의미는, '당신은 이것에 대해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냥 그러면 안 된다!' 라는 것이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누가 창조했는가, 그것이 과연 신성한가에 대해서는 어째서 한 가지 견해만 지녀야 한다는 것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그 개념들이 논쟁에 열려 있어서는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다."
신 가설 -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의도를 갖고 설계하고 창조한 초인적, 초자연적인 지성이 있다."는 가설이다.
신 가설에 대한 대안 - "무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과정의 최종산물로 출현한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 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망상이다.
종교사상가들은 에니미즘(원시부족)에서 다신교(로마,北구라파)를 거쳐 일신교(유대교와 그 파생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진행되는 흐름이 있다고 본다.
"다음에는 일신교에서 신이 하나 더 삭제되어 무신론이 될 것이다."
- 이븐 와라크. <내가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유> -
포교를 존립근거로 삼는 행위가 사라지면 사회에 더 큰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교회가 비과세 현금을 긁어 들이고 이미 먹고살 만해진 텔레비전 복음전도사들이 지겨울 정도로 번지르르해지는 미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서기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는 예수가 신과 동일실체, 즉 같은 실체나 본질을 지닌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그 논쟁으로 기독교계는 쓸데없는 것을 따지고 들다가 한 세기동안 둘로 분열되었다. → 하긴 지금까지 신학은 으레 그래 왔다.
과학 등 다른 학문 분야들과는 달리 신학은 1800년 동안 발전이 없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이에 대해 옳은 말을 했다.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조롱이다. 이성이 작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명확한 삼위일체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저 자칭 예수의 사제들이라는 협잡꾼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 토머스 제퍼슨 -
종교인들은 어떤 증거도 없을 뿐더러 증거가 있을 수가 없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지나치게 확신을 갖고 단언한다.
그저 조금 다를 뿐인 견해들에 유독 심한 적대감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신학적 견해들을 지지하는 증거가 전혀 없어서일 것이다.
제퍼슨은 칼뱅주의를 비판하면서 '세 신이 있다.' 는 교리에 조롱을 퍼부었다.
하지만 다신론을 붙들고 집적거리다가 그 방면으로 급격한 팽창현상을 보인 것은 기독교 중 로마 카톨릭 쪽이다.
우선 삼위일체에 하늘의 여왕 (거의 이름뿐인 여신인 마리아)이 합류돼 있다.
마리아는 신에 버금가는 기도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 萬神殿은 성인들이 합류되면서 더 확대된다. → 성인 5,120명, 네 무리의 천사들 (치천사, 지천사, 좌천사, 주천사, 역천사, 능천사, 권천사, 대천사, 수호천사)...
일부 페미니스트계 신학자들은 신을 여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역사적인 부당함을 바로잡으려 한다. →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무슨 차이?
존재가 성보다 덜 눈에 띠는 속성인가보다... 인간이 얼마나 잘 속는지...
"우리 문화의 중심에는 일신교라는 거대한 악이 자리하고 있다... 구약성서라는 야만적인 청동기시대의 문헌에서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라는 세 가지의 반인간적인 종교가 나왔다..."
- 고어 바이댈 -
세 가지의 아브라함 종교 중 다른 두 종교의 모태가 된, 가장 오래된 종교는 유대교다.
유대교는 우월성과 배타성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유독 사나운 신을 섬기는 한 부족의 신앙이었다.
바울은 덜 무자비하며 덜 배타적인, 즉 유대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유대교의 종파로서 기독교를 창시했다.
몇 세기 뒤 마호메트와 그 추종자들은 유대교 본연의 비타협적인 일신교로 회귀하여 이슬람을 창시했다.
18세기 계몽운동가들의 自然神은 구약성서에 등장하여 정신병적 비행을 저지르는 신과는 전혀 다른 숭고한 존재다. → 그는 우주 창조에 어울리는 존재로서, 인간사에 개의치 않으며, 개개인의 생각과 희망과 동떨어져 있으며, 우리의 잡다한 죄악이나 중얼거리는 뉘우침의 말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습적으로 미국의 국부들은 자연신교도로 간주되었다. 그들의 종교에 관한 글들을 보면 대부분이 우리 시대였다면 무신론자로 구분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세속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종교신앙만큼 사람들이 확고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없다... 무엇으로 부르든, 논쟁할 때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우군은 바로 이 지고한 존재다. 하지만 모든 강력한 무기가 그렇듯이, 신의 이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이 땅의 각 종파들은 정부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100% 따르라고 강요하려 한다... 시민인 내게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면 A,B,C,D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나라의 정치적 설교자들이 지겹고 신물난다... 입법자로서 상원에서 기명투표를 할 때마다 내 표를 통제할 권리를 신이 자신들에게 부여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종교 집단들의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는데 더욱 화가 난다... 그들이 자신들의 도덕적 확신을 보수주의라는 이름下에 모든 미국인들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나는 사사건건 그들과 맞서 싸울 것이다."
-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1981 -
국부들의 종교관은 현재 미국 우파 전도사들에겐 큰 관심거리다. 그들의 견해와는 반대로, 미국이 기독교 국가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1796년 조지 워싱턴이 초안을 작성하고 1797년 존 애덤스가 서명한 트리폴리 조약에 언급되어 있다.
"미합중국 정부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기독교에 토대를 두지 않고, 이슬람의 법이나 종교나 평화를 결코 적대시하지 않으며, 앞서 말한 주들은 이슬람 국가에 대해 어떤 전쟁도, 적대행위도 한 적이 없으므로, 종교적 견해에서 비롯되는 어떤 구실도 결코 두 나라의 화합을 해치지 못할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 트리폴리 조약. 1797 -
세속주의를 토대로 한 미국이 열성적 기독교 국가가 된 반면, 입헌군주가 국교의 수장인 영국이 가장 세속적인 국가가 된 것은 역설적이다.
영국은 신교도와 구교도가 번갈아 상대방을 조직적으로 살상한, 종파간 폭력으로 점철된 끔찍한 역사로 진저리가 났을 가능성도 있다.
미국에서 교회들은 군중(십일조)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하며, 그 경쟁은 시장에서 쓰이는 모든 공격적인 영업기법들을 총동원하여 이루어졌다.
오늘날 종교적 광신주의라는 요정이 미국에서 마구 날뛰는 모습을 미국의 국부들이 보았다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비물질적인 존재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관해 말하는 것과 같다. 영혼,천사,신이 비물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정말로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전혀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을 붙들고 씨름하거나 고심하지 않으며, 실재하는 것들에 만족하며 충분히 몰입해 있다."
- 토머스 제퍼슨. → 이는 불가지론자의 말과 다를 바 없다.
"나약한 마음을 노예처럼 위축시키는, 맹목적인 편견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내거라. 이성을 제자리에 앉히고 모든 사실과 견해가 그녀의 재판을 거치도록 하여라. 신의 존재 여부까지도 대담하게 묻고, 신이 존재한다면, 맹목적인 두려움보다 이성에 경의를 표하는 쪽을 더 용인할 테니."
- 토머스 제퍼슨. 1787. 조카인 피터 카에게 보낸 편지 -
"기독교는 여태껏 인간이 갈고 닦은 가장 비뚤어진 체제다."
- 토마스 제퍼슨 -
"기독교의 사법제도는 거의 15세기 동안 재판에 적용되어 왔다. 그런데 과연 어떤 결실을 맺어 왔던가? 어디에서든 성직자들은 다소 오만함과 나태함을, 평신도들은 무지와 굴종을 보여 준다. 그리고 양쪽 다 미신, 편협한 신앙, 종교박해를 드러낸다."
- 제임스 메디슨 -
"등대가 교회보다 더 유용하다."
- 벤저민 프랭클린 -
“A lighthouse is more useful than a church.”
- Benjamin Franklin -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에서 최상의 것은 종교가 없는 세계일 것이다."
- 존 애덤스 -
This would be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if there were no Religion in it.”
- John Adams -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기독교는 계시 종교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어떻게 수많은 우화, 설화, 전설이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계시 종교와 뒤섞여서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부른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일까?"
- 존 애덤스 –
"나는 인류 역사에 기록된, 슬픔을 악용한 사례들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을 언급할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바로 그리스도 수난이지요. 그 슬픔의 엔진이 낳은 재앙들을 생각해보십시오!" - 존 애덤스.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
미국의 국부들은 종교관은 개인의 문제라고 믿은 열렬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무신론자인 미국인들도 동등한 시민권과 애국심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는가요?"
- 로버트 셔먼 – 기자,
"아니오. 무신론자들을 시민으로 봐야 할지도, 그들을 애국자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곳은 신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 아버지 부시 -
미국의 대통령 후보자가 무신론자임을 인정한다면 이는 정치적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다.
"나는 힌두교도며, 이슬람교도며, 유대교도며, 기독교도며, 불교도다!"
- 간디 -
"인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종교라고 불리는 것의 현란한 모습을 보고 나는 공포에 질렸고, 그것을 비난했고,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내가 볼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맹목적인 믿음과 반응, 독단과 편협, 미신, 착취, 기득권의 유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 간디 -
"우리는 세속적인 인도를 말한다... 일부에서는 그것이 종교와 반대되는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국가가 모든 신앙을 똑같이 존중하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많은 종교를 지닌 인도 같은 국가에서는 세속주의를 토대로 하지 않으면 진정한 민족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 네루 -
신이 어떤 형태든 신 가설은 불필요하다.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 "신의 존재나 비존재가 영구히 과학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는, 건드릴 수 없는 질문이다." 라는 개념.
"사실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좋지요."
- 칼 세이건 -
불가지론이라는 용어를 만든 토머스 헨리 헉슬리를 비롯하여, 대단히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신 문제가 나오면 기꺼이 불가지론을 택한다.
"사실 불가지론은 신조가 아니라 방법 또는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할 때 기반이 되는 본질이다... 즉 지성의 문제와 관련된 경우, 다른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당신의 이성을 따르라. 증명되지 않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결론을 놓고 확실한 척 하지 말라... 사람이 건전하고 순수하다면,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지든 우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 토마스 헨리 헉슬리 -
과학자에게는 이 말이 숭고하게 받아들여지며, 누구도 헉슬리를 가볍게 비판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에 관한 인간의 판단들을 확실성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스펙트럼 상에 나열해보자.
1) 강한 유신론자 -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100% 확신한다. "나는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2) 사실상 유신론자 - 확률이 높지만 100%는 아님.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신을 믿으며 신이 있다는 가정下에 산다."
3) 불가지론자이지만 유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 50%보다 높지만 아주 높지는 않음.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신이 있다고 믿고 싶다."
4) 불가지론자 - 정확히 50%. "신의 존재와 비존재는 확률상 똑같다."
5) 불가지론자이지만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 50%보다 낮지만 아주 낮지는 않음. "신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회의적이다."
6) 사실상 무신론자 -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0%는 아님. "확실히 알 순 없지만 신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신이 없다는 가정下에 산다."
7) 강한 무신론자 - "신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꽃의 요정에 대해서만큼 신에 대해서도 불가지론자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버트란드 러셀은 그 입증 책임이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있다고 본다.
이빨요정, 유니콘, 염라대왕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은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우리의 행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중 상당한 비율이 그의 존재를 강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에 관한 것이 학위 주제인지조차 의심스럽네."
- 옥스퍼드大 학장 -
신학자들은 어떤 전문 지식이 있기에 과학자들이 할 수 없는 심오한 우주론적 질문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인가?
왜 사람들은 어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과학이 대답할 수 없다면 종교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까지 신학이 하나의 학문이라고 가정할 타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 물론 성서의 역사, 문학 등과 대립되는 신학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과학이 도덕적 가치들에 관해 조언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시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나는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이른바 과학 원리들에 위반되는 기적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기적도 없고 기도자에게 응답도 하지 않는 신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도 -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신이 이기도록 신이 돕는다고 믿는 운동선수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게는 자신을 편애해 달라고 신에게 떼를 쓰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신이 자신을 위해 주차공간을 비워 둘 것이라고 믿는 운전자들이 있다. 이런 형태의 유신론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신은 선한 이유로 한 기도에만 응답한다... 고통은 내게 용기와 인내를 보여 줄 기회를 제공한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심하게 앓아야 하고, 일부 사람들은 남들에게 중요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앓아야 한다..."
- 리처드 스윈번. 옥스퍼드大 신학자 -
지독히도 전형적인 신학적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이런 기괴한 추론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대화 중 스윈번은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에게 용기를 발휘하고 고귀해질 대단한 기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정당화하려 했다.
"헛소리 좀 작작해요!" - 피터 앳킨스. 옥스퍼드大 동료교수 -
종교문제는 거의 언제나 정치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그 초현실주의적인 문화전쟁이 미국을 분열시키고 있다.
암흑시대의 농민을 21세기로 데려온다면 우리 문명도 신과 흡사한 수준에 이른 초인들의 외계문명처럼 보일 것이다.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 아서 클라크. <제3의 법칙>. → 복잡한 지적 존재들은 진화의 산물이다.
03.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다섯 가지 증명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하는데다 공허하기까지 하다.
1) 회귀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신이다. 무언가가 최초의 움직임을 일으켜야 하며, 우리는 그 무언가를 신이라 부른다.
2) 모든 결과에는 앞선 원인이 있으며, 여기서도 우리는 회귀의 압박을 받는다. 그 최초의 원인을 종식시키는 것을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
3)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물체들이 존재하므로 그것들을 출현시킨 비물리적인 무언가를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
4) 최대 선은 우리 안에 있을 수 없다. 완벽성의 기준이 될 최대값이 있어야 하며, 우리는 그 최대값을 신이라고 한다. → 이것이 논증이란 말인가?
5) 설계 논증. 살아 있는 것들은 마치 설계된 듯이 보인다. 설계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며, 우리는 그를 신이라 부른다.
회귀 개념에 의존하는 앞의 세 가지 논증은 신을 불러내 회귀를 종식시킨다. 그것들은 신이 회귀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부당한 가정을 한다.
무한회귀의 종식자를 독단적으로 생각해낸 뒤, 단순히 이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기에 신의 속성들을 부여할 이유는 전혀 없다.
논리학자들은 全知와 全能이 상호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 신이 全知하다면, 그는 자신이 전능을 발휘하여 역사의 경로에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전지한 신, 미래를 아는 신은 알 수 있을까? 전능함이 미래에 자신의 마음을 바꾸리라는 것을..."
- 카렌 오언스 -
그의 증명들 중 지금까지 널리 쓰이는 것은 설계 논증 밖에 없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상대로 궁극적으로 패퇴시킬 수 있는 논증으로 여긴다.
다윈의 설계 논증 타파만큼 대중 신앙을 철저히 패배시킨 탁월한 추론은 없을 것이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복잡성과 우아함을 경이로운 수준에 올려 놓음으로써 설계되지 않은 것도 설계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제논의 역설 - 아킬레스는 거북보다 10배는 빨리 뛸 수 있으므로, 그는 거북에게 100미터 앞에서 출발하라고 한다. 아킬레스가 100미터를 달리니 거북은 이제 10미터 앞에 있다. 아킬레스가 10미터를 더 달리니 거북은 이제 1미터 앞에 있다... 그런 식으로 둘의 차이는 계속되고 아킬레스는 결국 거북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철학자들의 일이 관찰보다는 생각을 통해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진리라면 관찰이라는 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변증법적 속임수를 통해서는 결정할 수 없는 아주 큰 문제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베토벤의 장엄한 음악, 미켈란젤로의 천장벽화의 감동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신이 있다고 해도 장엄하고, 신이 없다고 해도 장엄하다. 그것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연과 베토벤과 미켈란젤로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종교적 경험은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갖가지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그들의 믿음이 대중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종교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을 때엔 그것을 미친, 정신병적, 망상적이라고 부를 가능성이 높다... 종교인은 일반적으로 미치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절대적으로 미친 것이다."
- 샘 해리스. <신앙의 종말> -
인간의 뇌는 모형 구축에 탁월하다. 잠잘 때는 그것을 꿈이라 부른다. 깨어 있을 때는 그것을 상상이라 하고, 유독 생생할 때는 환각이라고 한다.
예수가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다. 기록이 있다고 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
"그 기록은 누가 언제 썼을까?... 그들은 그 내용을 어떻게 알았을까?...당시에 그들은 우리 시대에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기록을 한 것일까?... 그들은 편견없는 관찰자였을까, 아니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었을까?..."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가 사망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쓰였다.
심지어 예수의 삶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도 바울의 서간들보다 한참 뒤에 쓰인 것이다.
그 뒤로 모든 복음서들은 종교적 의도를 지닌, 오류에 빠지기 쉬운 필사본들로 반복되어 복사되고 복사되었다.
누가복음에서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으므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힘으로 돌아가야 했다. → 다윗은 요셉보다 1000년 앞선 인물이다. 도대체 로마인이 요셉에게 1000년 전의 조상이 살았던 동네로 가라고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터무니 없는 허구다. 또한 인구조사는 헤롯 왕이 사망한 한참 뒤인 서기 6년에 있었다.
전설을 구성하는 내용들(동쪽의 별, 처녀 출산, 왕들의 아기숭배, 처형, 부활, 승천 등)은 지중해와 근동지역에 존재했던 他종교들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세상에는 성서가 정확한 역사 기록이라며, 그것을 자신의 신앙을 지탱해 주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소박한 기독교인들이 많다." - 조지 거슈윈.
마태는 요셉이 다윗의 28대 후손이라고 말한 반면, 누가는 41대 후손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두 족보에는 겹치는 이름이 거의 없다.
아무튼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면, 요셉의 족보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구약의 예언을 예수에게 맞추기 위해 그 족보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네 편의 복음서는 도마,베드로,니고데모,빌립,바들로메,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하여 적어도 12편 정도 되는 복음서 중에서 임의로 선택한 것이다.
"신약성서를 이야기할 때 공의회가 복음서 저자들이라 명명한 사람들 뿐 아니라 사이비 복음서 저자들이라고 판정한 사람들의 것들까지 그리스도의 모든 역사서들을 읽어야 한다. 그 사이비 복음서 저자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키려고 했고, 너는 공의회 성직자들의 이성이 아니라 네 자신의 이성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지..."
- 토머스 제퍼슨. 조카에게 보낸 편지 -
도마서는 예수가 아이였을 때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친구를 염소로 변하게 하고, 진흙을 참새로 바꾸고, 나무토막을 길어지게 해서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왔다는 등 마법의 능력을 남용했다는 일화들이 많이 실려 있다.
네 편의 복음서에 공통되는 내용은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이라는 공통의 원전에서 유래했다.
네 편의 복음서 저자들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음은 거의 확실하다.
"예수가 처녀의 자궁에서 그의 아버지인 신에 의해 신비하게 잉태되었다는 이야기는 미네르바가 주피터의 뇌에서 나왔다는 우화와 같은 범주로 분류될 날이 올 것입니다."
-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에게 쓴 편지 -
다빈치 코드와 복음서들의 유일한 차이점은 복음서들이 오래된 소설인 반면, 다빈치 코드는 현대 소설이라는 것 뿐이다.
"지적으로 저명한 인물들 대다수는 기독교를 불신하지만, 대중에게 그 사실을 숨긴다. 수입원을 잃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 버트란드 러셀 -
뉴턴은 자신이 종교인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가 될 때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다.
젊은 멘델에게는 수도사가 되는 것이 과학을 계속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에게 그 신분은 연구비나 다름없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이전 세기에 비해 신앙고백을 하라는 사회적, 사법적 압력이 덜 했고, 신앙을 버려도 과학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블래즈 파스칼은 신이 존재할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잘못 추정했을 때 닥칠 대가가 훨씬 크다고 판단해, 신을 믿는 편이 더 낫다고 했다.
하지만 그 논증에는 아주 기묘한 점이 있다. 믿음은 숫자 맞추기처럼 어느 쪽을 택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회에 가기로 결심할 수 있고, 사도신경을 암송하기로 결심할 수 있고, 성경을 믿는다고 맹세하기로 결심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믿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나로 하여금 실제로 믿도록 할 수는 없다.
파스칼의 내기는 신을 믿는 척하는 것에 관한 논증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신앙을 결정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다.
믿는다는 것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 그를 믿는 것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버트란드 러셀은 자신이 죽어서 신 앞에 섰을 때 신이 왜 자신을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여, 증거가 불충분했습니다. 증거가요."
신은 비겁하게 양다리를 걸친 파스칼보다 용기있는 회의주의를 내세운 러셀을 훨씬 더 존중하지 않을까?
당신은 신이 정직한 회의주의보다 부정직하게 날조한 신앙(혹은 정직한 신앙)을 더 높이 산다는 쪽에 걸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죽어서 대면할 신이 바알이라고 가정하고, 바알이 옛 경쟁자인 야훼처럼 다른 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해 보자.
파스칼은 엉뚱한 신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신이 없다는 쪽에 내기를 걸지 않았을까?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진실인 것과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습성을 지닌다.
설계자 가설은 즉시 "설계자는 누가 설계했는가?" 라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설계자 신은 조직화한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이용할 수 없다.
04.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
"생명이 지구에 출현할 확률이 고물 야적장을 휩쓰는 태풍이 운 좋게 보잉 747을 조립해 낼 확률과 별 다를 바 없다." - 프레드 호일.
당신이 설계자를 불러내어 설명하고자 하는 실체가 통계적으로 그 아무리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그 설계자는 그것보다 더 있을 법하지 않은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신은 궁극적인 보잉 747이다.
"진화는 우리가 지닌 가장 오래된 개념 중 하나를 반박한다. 바로 크고 엄청나고 명석한 것이 그보다 못한 것을 만든다는 개념이다." - 대니얼 대닛.
창조론의 논리는 언제나 똑같다. 일부 자연현상은 우연을 통해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가능성이 희박하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경이롭다.
창조론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우연의 대안은 오로지 설계 뿐이다. 따라서 그 일은 설계자가 한 것이 틀림없다.
과학의 대답도 언제나 똑같다. 설계는 우연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자연선택이 더 나은 대안이다.
사실 설계는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설계자를 설계한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연과 설계는 둘 다 통계적 비개연성의 해답이 아니다. 진정한 해답은 자연선택이다. 창조론자들은 누적의 힘을 이해하지 못한다.
<불가능한 산 오르기>에서 산의 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어서 오를 수가 없지만, 다른 한쪽은 정상까지 완만한 비탈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는 눈이나 편모같은 복잡한 장치가 놓여 있다. 진화는 산을 돌아가서 완만한 비탈을 따라 정상까지 천천히 올라가는 것에 비유된다.
창조론자들은 언제나 생물학적 적응이 대박 아니면 쪽박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눈은 보든지 못 보든지 둘 중 하나이며, 날개도 날든지 못 날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 중간 단계는 없다.
하지만 그 견해는 틀렸다. 현실에서는 중간 단계들이 많이 나타난다.
진짜 생명은 산의 뒤쪽에 있는 완만한 비탈을 찾는 반면, 창조론자들은 맹목적으로 앞쪽의 절벽만 쳐다본다.
"무수하게 연속된, 미미한 변형을 거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복잡한 기관을 보여 준다면 내 이론은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례를 전혀 찾을 수 없다."
- 찰스 다윈 (1809~1882) -
"대다수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발견한 것을 지루해 한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무지다."
- 매트 리들리 -
신비주의자들은 수수께끼에 기뻐하며 그것이 신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과학자들은 다른 이유로 수수께끼에 기뻐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할 일을 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지적설계론은 자체 증거 없이, 과학이 남긴 틈새에서 번성하면서 그 틈새들을 연구의 전주곡으로 삼는 과학의 요구와 불편하게 대면하고 있다.
추정된 진화과정을 기록한 화석이 없다면, 증거가 없으니 신이 개입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살인자임을 입증하려면 살인자가 범죄를 저지르기까지의 모든 단계가 완벽한 비디오 기록처럼 한 장면도 빠뜨리지 말고 기록되어 있어야 하나?
시체들 중 화석으로 남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지금처럼 중간 단계의 화석들을 많이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행운이다.
지적설계론은 중간단계 부재의 공격은 어떤 과학자가 나서서 중간 단계를 발견하면 취약해진다.
지적설계론의 바탕에 깔린 추론은 게으르고 패배주의적이다. 무지에 신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행위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세균의 편모 모터는 자연의 경이다. 자유롭게 회전하는 축을 지닌 유일한 非인공적 모터다.
신경과 혈관을 축받이 너머로 어떻게 집어넣는다는 말인가? 편모 모터는 실처럼 생긴 프로펠러다.
"더욱 위험이 큰 또 하나의 유혹이 있다. 바로 호기심이라는 병이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면역계는 우리를 쇠약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질병들을 막아 줄 방어체계다.
지적설계자들은 과학 또는 의학 지식의 발전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데다,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그런 귀찮은 일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요통, 탈장, 자궁탈출증, 굴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질병 중 많은 것들은 수억 년 전에 걸쳐 네 발로 걷도록 다듬어진 몸을 그대로 지닌 채 두 발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물들이다.
눈, 날개, 편모 모터, 면역계를 포기했을지도 모를 틈새 신학자들은 종종 생명의 기원에 남은 희망을 걸곤 한다.
진화의 뿌리가 무생물 화학이라는 점은 그 뒤의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그 어떤 전이 사례들보다 더 큰 틈새처럼 보인다.
생명의 발생은 오직 한 번만 일어났어야 한다. 일단 행운이 한 번 주어지면 자연선택이 나머지 일을 떠맡는다.
골디락스 영역이 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아서 그 영역에 있는 행성에는 물이 있을 수 있다.
지구의 공전 궤도도 정확히 말하면 타원형이지만 원에 아주 가깝기 때문에 골디락스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지구는 유달리 생명에 우호적인 환경이다. 모든 확률 진술은 특정한 수준의 무지 속에서 이루어진다.
템플턴의 돈이 과학을 타락시킨다.
"당신은 기적을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가 처녀의 소생이라고 믿습니까?" 이런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하다니...
오늘날의 종교인들에게 그런 직접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왜 무례한가? 그것은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무례하다.
그들의 합리적인 정신은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기에, 차라리 질문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대답이다. 그것이 Yes라면 말이다.
05. 종교의 뿌리;
자연은 늘 냉혹한 실용주의가 이긴다.
종교는 독실한 신자의 목숨 뿐 아니라 남들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지키기 위해 고초를 겪었고, 서로 거의 구분이 안 되는 다른 종파에게 박해를 받은 사례도 많다.
중세 성당은 100명의 인력을 투입한다면 다 짓는데 수세기가 걸리겠지만, 거주 등 다른 유용한 목적에 사용된 적이 없다. → 자원의 독식.
독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을 위해 죽었고, 신을 위해 살인을 했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종교의 혜택은 과연 무엇일까?
다윈주의자가 말하는 혜택은 보통 개체가 지닌 유전자들의 생존에 어떻게든 기여한다는 의미다.
보편적 종교는 좀 다를까? 감기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이지만, 우리는 감기가 우리에게 혜택을 준다는 주장을 펼치지는 않을 것이다.
"신자가 회의주의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은 술 취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과 별 다를 바 없다."
- 조지 버나드 쇼 -
의사가 환자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위로와 안도감이 있다. 그 플라세보 효과는 그다지 신비한 것도 아니다.
청진기 너머에 있는 지적인 얼굴이 들려 주는 안심시키는 목소리에 사소한 병이 즉시 치유되는 경험을 나는 여러 번 봤다.
종교가 스트레스를 줄임으로써 생명을 연장하는 플라세보일까?
"모든 종교는 똑같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축제일이 서로 다른 죄의식이다."
- 캐시 래드먼. 미국 코미디언 -
"종교는 통치계급이 하위계급을 복종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다윈주의자는 정치적 설명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흑인 노예들이 내세의 약속에서 위안을 얻었고, 그것이 현세에서 느끼는 그들의 불만을 경감함으로써 노예 주인들에게 혜택을 준 것은 분명하다.
다윈주의자는 사람들이 왜 종교의 매력에 쉽게 넘어가는지, 그럼으로써 왜 사제와 정치가와 왕에게 쉽게 이용당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집단선택 - 내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형제애를 고취시키고, 덜 종교적인 집단들의 희생下에 종교적인 집단들이 살아 남는 것을 도왔다.
나는 종교를 다른 무언가의 부산물로 보며, 현재 이 견해를 지지하는 생물학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인공조명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밤에 보이는 빛이라고는 달빛과 별빛 밖에 없었다.
신경계가 경험법칙을 광학적 무한대에 있는 달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촛불에 적용한다면 나방은 나선궤도를 그리며 불꽃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나방에게는 촛불을 볼 기회가 달을 볼 기회에 비하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비록 치명적일지라도 대체로 나방의 경험법칙은 우수하다.
우리는 수천 마리의 나방이 달이나 별이나 먼 도시의 불빛을 향해 소리없이 곧장 나아간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촛불을 향해 빙빙 돌며 날아드는 나방들만을 보고서 잘못된 질문을 던진다. "왜 나방들은 자살을 하는 걸까?"
그것을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유용했던 나침반이 만들어 낸 빗나간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검증할 수 있는 과학적 사실들과도 명백히 모순되는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종교를 위해 죽거나 종교를 위해 죽인다. 우리는 나방의 자기희생 행동에 놀라는 것처럼 그것에도 놀란다.
종교적 행동은 빗나간 것, 즉 다른 상황에서는 유용한 혹은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지 모른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명령에 복종할지의 여부를 각각의 병사가 판단하도록 둔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병사들에게 명령에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국가는 전쟁에서 지기 십상이다.
컴퓨터는 시킨 대로 작업을 한다. 그러나 그에 따른 부득이한 부수적인 결과로서, 컴퓨터는 나쁜 명령에도 마찬가지로 로봇처럼 복종한다.
병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처럼 그저 복종할 뿐이다. 컴퓨터는 의문을 품지 않고 복종하기 때문에 유용하며, 바로 그 때문에 바이러스에 취약하다.
유용하게 복종하면서 동시에 감염에 면역되어 있는 컴퓨터를 설계하기란 어렵다.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연선택은 아이의 뇌에 부모나 다른 어른이 어떤 말을 하든 믿는 경향을 심어 놓았다. 그렇게 믿고 따르는 것은 생존에 매우 유익하다.
그것은 나방이 달을 기준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믿고 따르기의 이면에는 노예처럼 속기가 쉽다.
그로부터 마음 바이러스에 대한 취약성이라는 부산물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그로부터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한 가지 결과는, 아이가 좋은 조언과 나쁜 조언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악어가 우글거리는 연못에서 헤엄치지 말라."는 좋은 조언이지만, "보름달이 뜰 때 염소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시간과 염소를 낭비시킨다.
좋은 훈계든 나쁜 훈계든, 똑같이 믿을 만한 것처럼 들린다. 부산물 모형에 따르면 지역별로 사실적 근거가 전혀 없는, 서로 다른 임의의 신앙이 대물림될 것이고, 그 신앙은 비료가 작물에 좋다는 등의 유용한 지혜와 똑같은 확신下에 믿어질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아이의 뇌가 취약하므로 일찌감치 교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예수회는 호언장담을 한다. "내게 일곱 살짜리 아이를 데려오면,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 그것은 진부하지만 정확한(사악한) 말이다.
아이의 마음이 속기 쉽다는 사실은 달이나 별을 보면서 나아가는 나방에 비유할 만한 여러 가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종교 신앙들은 그 안에서 양육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이해 보인다.
아이들은 본래 이원론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종교는 그런 본능적인 이원론의 부산물이다. 인간, 특히 아이들은 타고난 이원론자다.
아이들은 모든 것에 목적을 갖다 붙이기를 좋아한다. 구름은 비를 내리기 위한 것이다. 뾰족한 바위는 동물들이 가려울 때 긁도록 되어 있다...
천성적 이원론과 천성적 목적론은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면 종교로 향하게끔 우리에게 성향을 부여한다.
빛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나방의 특성이 의도하지 않은 자살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삶은 대체로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와 강화 과정을 통해 추진된다. 종교는 많은 긍정적인 강화 작용을 일으킨다.
위험한 세계에서 사랑과 보호를 받는다는 따스한 느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상실, 어려운 시기에 기도에 응답하는 높은 자의 도움 등이 그렇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의식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들은 더 두드러지게 표현해야만 지각한다.
"이성은 신앙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경멸함으로써 신의 말씀에 맞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성으로부터 시선을 돌려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마음속에서 이성을 파괴해야 한다..." - 마르틴 루터.
"종교에서 진리는 그저 살아남은 견해를 지칭한다."
- 오스카 와일드 -
한 종교의 개념들은 그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도 다른 종교의 개념들보다 더 낫지 않다.
06. 도덕의 뿌리 : 우리는 왜 선한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의 웃음과 안녕을 위해서..."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단순한 신학적 견해 차이가 근본주의자들의 매우 심한 독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당혹스럽다.
왜 신이 그토록 난폭한 방어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언뜻 보기에는 자연선택이 진화를 추진한다는 다윈주의 개념은 선,도덕,예의,감정이입,연민 같은 감정들을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않을 듯하다.
자연선택은 배고픔, 두려움, 성적 욕망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생존이나 유전자의 보존에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다윈주의 논리에서 세상에 살아 남는 단위들은 경쟁자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살아 남는데 성공한 단위들일 것이다.
이 맥락에서 이기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이기적 생물, 이기적 집단, 이기적 종, 이기적 생태계가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임을 드러낸다.
호혜적 이타주의는 필요와 그것을 충족시킬 능력의 비대칭 때문에 나타난다. → 소와 장내 미생물, 악어와 악어새, 빌 게이츠와 에이즈 환자...
인간에게는 차용증서와 돈이 거래상의 지체를 허용하는 장치들이다.
무신론자와 종교인의 판단에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차이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겠는가?"
당신이 선하고자 애쓰는 이유가 오로지 신의 인정과 보답을 얻거나 신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인가?
그것은 당신의 모든 움직임과 생각까지 감시하는 하늘의 감시 카메라와, 당신의 머리에 든 도청기에 대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지 도덕이 아니다.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신의 감시를 받지 않아도 선할 것임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선하려고 신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치명적으로 훼손하게 된다.
종교인들은 종교가 자신들에게 선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특히 개인의 죄를 체계적으로 이용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더 그렇다.
기독교 보수주의와 사회의 건전도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면, 우리는 미국의 공화당의 주에서 그것은 어떤 징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폭력 범죄율이 가장 낮은 도시 25개 가운데 62%는 민주당 주에 있으며, 38%는 공화당 주에 있다.
25개의 가장 위험한 도시 중에서 76%가 공화당 주이며, 24%는 민주당 주에 있다.
사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다섯 곳 중 세 곳이 신앙심 깊은 텍사스 주에 있다.
설령 우리가 도덕적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을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 많은 사람들이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성서의 권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자기 경전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 딱할 정도로 호기심을 갖지 않는다.
자신들의 도덕을 성서로부터 이끌어 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07.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정신;
"정치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갔지만, 종교는 그보다 열 배는 많은 목숨을 앗아 갔다." - 숀 오케이시.
성경의 상당 부분은 그저 기이할 뿐이다. 수많은 익명의 저자, 편집자, 필사자 등이 9세기에 걸쳐 지리멸렬한 문서들을 혼란스럽게 엮고 짓고 수정하고 번역하고 왜곡하고 개정한 선집에서 기대할 만한 바로 그런 양상을 보여 준다.
불행히도 광신자들은 바로 그 기이한 내용들을 오류없는 도덕의 근원이자 인생법칙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곧이곧대로 자기 도덕의 근간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 책을 잃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노아 이야기 - 신은 한 가족만 빼고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모조리 익사시켰고, 덤으로 나머지 동물들까지 익사시켰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노아 이야기를 비롯하여 성서의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2004년 발생한 지진해일이 판 구조의 변동이 아니라, 음주가무 등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되었다는 성직자들 중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
무한한 우주를 창조한 신성한 존재가 대체 왜 인간의 비행 같은 하찮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 인간은 자신의 하찮은 죄를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확대시키면서까지 으스대고 있다.
당신이 전능한 신이라면 좀더 표적을 좁혀서 범죄자를 해치우지 않았을까?
소돔과 고모라 - "형제들이여, 그리 못되게 굴지 마시오. 보시오. 내게 남자를 알지 못한 딸이 둘 있소. 그들을 당신들에게 내어 줄 테니 마음대로 하시오. 단 손님들은 건드리지 마시오. 그들은 내 집 지붕 아래 들어왔으니 말이오."
- 창세기 19 : 7~8
이 강력한 종교가 여성들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확실하게 말해준다.
롯은 딸들의 처녀성을 두고 거래를 할 필요가 없었다. 천사들이 기적처럼 폭도들의 눈을 안 보이게 함으로써 그들을 물리쳤으니까.
이후 롯의 두 딸은 남자에 굶주려 아버지를 취하게 만든 뒤 관계를 가졌다. 이 일그러진 가족이 소돔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었다니...
소돔 이야기는 사사기 19장에서 섬뜩하게 반복된다.
"형제들이여, 안 되오. 그리 못되게 굴지 마시오. 이 남자는 내 집에 들어와 있으니 이런 어리석은 짓 마시오. 여기 처녀인 내 딸과 그의 첩이 있소. 그들을 내어 줄 테니 욕보이든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몹쓸 짓을 하지 마시오."
이 이야기는 롯의 이야기와 너무나 비슷하다. 그것은 신성한 경전의 출처가 잡다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다.
롯의 삼촌인 아브라함은 세 위대한 일신교의 창시자였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들이 그를 본받고 싶어 할까?
비교적 초기에 아브라함은 기근에서 벗어나고자 아내 사라와 함께 이집트로 갔다. 그는 아내가 이집트인들이 탐낼 만큼 아름다운 여성인지라 남편인 자기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여동생인 체하기로 했다. → 창 12장.
미모에 힘입어 그녀는 파라오의 하렘에 들어갔고, 아브라함은 덩달아 파라오의 총애를 받아 부자가 되었다.
신은 이런 타협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파라오와 그의 일가에 전염병을 퍼뜨렸다. → 왜 사람들을 속인 아브라함에게 퍼뜨리지 않았을까?
화가 난 파라오는 아브라함에게 왜 사라가 부인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알아야겠다고 했다. 결국 그녀를 돌려주고 이집트에서 내쫓았다.
기이한 점은 이 부부가 나중에 또 다시 똑같은 술수를 썼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랄의 왕 아비멜렉이 대상이었다. → 창 20장.
그도 아브라함의 권유로 사라와 혼인했다. 그 역시 그녀가 아브라함의 아내가 아니라 여동생이라 믿었다.
그도 파라오와 거의 똑같은 말로 분노를 표현했고, 우리는 두 왕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그런 불쾌한 일화들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는 유명한 일화에 비하면 사소한 과오에 불과하다.
현대의 도덕주의자는 그런 심리적 외상을 아이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도덕 기준들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학대이자,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자, 뉘른베르크 전범들의 변명이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세 유일신 종교의 중요한 기반이 된 신화들 중 하나다.
이 끔찍한 이야기로부터 어떤 종류의 도덕을 이끌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사사기 11장에서, 입다는 신과 거래를 했다. "암몬군을 이기도록 해주면 제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맨 처음 문을 여는 자를 번제물로 삼겠습니다."
그의 외동딸이 춤을 추면서 그를 맞이하러 집 밖으로 나왔다. 입다는 딸을 불태웠고, 신은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신이 잠시 고개를 돌리면 유대인들은 바알신, 즉 우상이라는 일종의 매춘부에 빠지곤 한다. 혹은 금송아지에 빠지는 아주 불행한 사태도 있었다.
모세는 세 유일신 종교의 신도들에게 아브라함보다도 더 각광받는 역할모델이다.
아브라함이 최초의 족장이긴 했지만, 유대교와 그 파생 종교들의 교리를 세운 인물은 모세다.
석판을 들고 시내산을 내려온 모세는 석판을 깨뜨렸고, 금송아지를 빼앗아 불태운 뒤, 가루로 만들어 물에 푼 다음 사람들에게 마시게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사제 부족인 레위인들에게 칼을 들어 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라고 말했다.
죽은 자는 약 3천 명에 달했으며, 그 정도면 신의 질투 어린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지 모르겠다. 아니었다.
"그들이 아론을 시켜서 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보내겠다는 것이 신이 내뱉은 말이었다.
민수기에는 신이 모세를 부추겨서 미디안인들을 공격하도록 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는 처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만 남자를 알지 못한 여자 아이들은 너희를 위해 살려 두어라." 모세는 현대의 도덕주의자들을 위한, 위대한 역할 모델이 아니었다.
불운한 미디안인들은 자기 고장에서 대량 학살된 희생자들이었다. 대량학살은 계속된다.
아모리족,가나안족,히타이트족,브리즈족,이휘족,여부스족 등을 고향에서 내쫓겠다면서 신은 진짜 관심사를 언급한다. 바로 경쟁 신들이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다. 너희가 그들의 딸을 며느리로 삼으면, 그들의 딸이 저희 신을 섬기고 너희 아들까지 저희 신을 섬기게 할 것이다."
현대의 도덕이 어디에서 나오든 간에, 성경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성경을 도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 안에 뭐가 적혀 있는지 모르는 걸까?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악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 스티븐 와인버그. 미국의 물리학자. 노벨상 수상자.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 블래즈 파스칼.
구약성서의 내용이 불쾌하다는 것은 누가나 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명예를 회복하고 바로잡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발전했다.
예수에게 가족의 가치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들에게 가정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누구든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대체 무슨 종파가 그런가? 당신을 가르칠 테니 가족을 버리라고 하다니!
신약성서에는 선한 사람이라면 지지해선 안될 가르침도 있다. 특히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원죄의 속죄가 그렇다.
신약성서의 핵심을 이루는 이 가르침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불태우려 했던 이야기만큼이나 도덕적으로 혐오스럽다.
특정 종교가 고문 및 처형 기구를 신성한 상징으로 채택하고, 그것을 때로 목에 걸기도 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만일 예수가 20전 전에 죽었다면, 카톨릭 신자들은 목에 십자가 대신 작은 전기의자를 걸고 다닐 것이다."
- 래니 브루스.
하지만 그 배경이 되는 신학과 처벌 이론은 더 고약하다. 아담과 이브의 죄는 부계를 따라 전달된다고 여겨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액으로 전달된다고 보았다. 심지어 태아들까지 먼 조상의 죄를 물려받는다고 주장하는 윤리철학은 대체 어떤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가 바로 원죄라는 말을 만든 인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언과 논의는 초기 신학자들이 죄에 병적으로 몰두했음을 드러낸다.
기독교인들은 압도적으로 죄, 죄, 죄, 죄, 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역겹고 사소한 것에 몰두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다니...
"당신들의 주된 걱정거리는 우주의 창조자가 인간들이 벌거벗었을 때 한 일에 여전히 화를 낼 것이라는 점이다. 당신들의 이 소심함이 매일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 샘 해리스.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신은 유전되는 아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
바울이 이 혐오스러운 교리를 상세히 다룬 이후로, 예수는 우리의 모든 죄의 대속자로 숭배를 받아 왔다.
아담의 죄만이 아니다. 미래의 죄도 마찬가지다. 후손들이 죄를 저지르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롯 유다의 배신이 우주적 계획의 필수적인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적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예수의 살인자들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예수가 우리 모두를 대속하기 위해 배신당하고 처형당하고 싶어 했다면, 속죄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대로 유다와 유대인들에게 보복한다는 것은 좀 부당하지 않을까?
서기 300년 경에 쓰인 유다 복음서는 유다의 관점에서 쓰였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예수가 그 역할을 맡으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전부 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인류가 대속할 수 있게 하려는 계획의 일부였다.
그 교리도 못마땅하지만, 유다가 그 뒤로 죽 비난을 받아 왔다는 점도 불쾌함을 심화시킨다.
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속죄가 악의적이고 가학피학적이고 혐오스럽다.
우리는 그것을 개가 짖는 소리로 치부해야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객관성이 무뎌져 있다.
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그렇게 함으로써 먼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살해자라고 박해받고 학살당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 그 유전되는 죄는 정액에 담겨 전달되었을까? 원죄의 주인공 아담이 실존인물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유대인 학자 베르메스가 밝혔듯이, 바울은 피가 없으면 속죄도 없다는 유대교의 오랜 신학적 원리에 푹 빠져 있었다.
오늘날의 진보적인 윤리학자들은 희생양 이론은커녕 어떤 형태의 응징적인 처벌 이론도 옹호하기 어렵다고 본다.
신이 과연 누구를 감동시키려 했는가? 그 자신인가? 희생자이자 재판관이자 배심원인 자기 자신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 권하는, 타인에 관한 도덕적 내용들의 상당수가 원래 협소하게 정의된 내집단만을 고려한 것이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은 원래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다른 유대인을 사랑하라." 는 뜻이었다.
성서는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질 만한 근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예수는 구원될 자신의 내집단을 엄격하게 유대인으로 한정했으며, 그 점에서 그는 구약성서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그 전통이 그가 아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그것은 유대인을 죽이지 말라는 아주 구체적인 의미였다.
네 이웃과 관련된 모든 계명들은 똑같이 배타적이다. 이웃은 동료 유대인을 의미한다.
예리코 전투에서 여호수아의 대량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어느 모로 보나 종교적이다. → 예리코 전투 관련 아이들의 견해에 관한 타마린의 실험.
이 사례는 종교의 엄청난 힘, 특히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역사적 적대감과 불화를 대물림시키는 힘을 보여 준다.
여호수아 대신에 린 장군, 이스라엘 대신에 3천 년 전의 중국 왕조를 넣는다면, 여호수아의 대량학살에 찬성할 사람은 거의 없다.
여호수아의 행동은 야만적인 집단학살 행위였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을 취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아이들에게 대량학살을 용납하게 하는 등 견해 차이를 빚어 내는 것이 바로 종교였다.
유대인 신을 이교도들에게 받아들이게 한다는 착상을 떠올린 사람은 바울이었다.
"바울이 자신의 계획을 불결한 자들에게 적용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예수는 무덤에서 돌아누웠을 것이다." - 존 하팅.
성경은 대략학살, 외집단의 노예화, 세계 지배에 대한 명령들을 구비한 내집단 도덕의 청사진이다.
사실 고대의 많은 작품들이 내집단 도덕을 담고 있다. 종교들 가운데 유대교가 유독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주여, 당신께 영광을 바치나이다. 이교도도, 유대교인도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것. 남들처럼 우연이 아니었기에..." - 아이작 와츠의 찬송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배경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신은 그토록 원하는 기독교인으로 태어날 자를 어떻게 결정했단 말인가?
"저를 이교도로 태어나지 않게 하셨기에 찬미합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하셨기에 찬미합니다. 노예로 태어나지 않게 하셨기에 찬미합니다..."
종교는 분명히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며, 그것이 종교에 가해지는 주된 비난 중 하나다.
그러나 전쟁이나 종파간 다툼이 실제로 신학적 견해 차이에 관한 것인 경우는 거의 없다.
"받아라. 성체화주의자이자 성모 찬미자이자 향불을 피우는 녀석아!" 신교도가 카톨릭교도를 살해할 때 이런 식으로 중얼거리지 않는다.
종교는 내집단과 외집단 사이의 증오와 불화의 꼬리표이며, 피부색, 언어 등 여타 꼬리표들이 없을 때 종종 이용되곤 한다.
종교와 종교적으로 분리된 교육이 없다면, 그 분열도 사라질 것이다. 北아일랜드, 코소보, 팔레스타인, 이라크, 수단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종교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범죄들 가운데 존중할 만한 것이 있을까? 종교는 치명적인 결과를 빚어 낼 토템을 세우는데 능숙하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잘해내면 둔감해짐으로써 나중에 같을 일을 더 수월하게 해낸다." - 살먼 루시디.
나는 인간이 종교가 없다고 할지라도 내집단에 충성하고 외집단을 적대하는 강한 성향을 보이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맞수인 두 축구팀의 팬들이 그 현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그 피해를 증폭시키고 악화시킨다.
1) 아이들에게 꼬리표 붙이기. 신교 아이들, 구교 아이들... 그들이 종교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렇다.
2) 분리된 학교. 만일 분리교육이 폐지된다면 北아일랜드 분쟁은 한 세대만에 사라질 것이다.
3) 이교도와의 혼인을 금기시함. 집단간의 혼인을 허용한다면 적대감은 자연히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설령 종교가 그 자체로는 달리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자의적이고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분열은 세상에 상당한 영향을 발휘한다.
경전은 좋은 원리들과 나쁜 원리들을 구분하는 규칙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당신이 서열의 꼭대기에 오를지 바닥으로 떨어질지 알지 못한다면 언제나 자신의 규칙을 고안하라."
- 존 롤스.
이누이트의 식량 공유 방식 - 음식을 써는 사람이 마지막 조각을 먹는다.
시대정신은 늘 변한다. 너무나 가차없이 변하기에 우리는 종종 그것을 당연시하고 변화가 본연의 현상임을 잊곤 한다.
격동의 1960년대는 자유주의적 현대성을 빚어 낸 전설적인 시대였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뭔가가 변했다. 그 변화는 종교와 아무 관계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은 종교 때문이 아니라 종교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이다.
시대정신은 변한다. 변화는 보통 진보를 향하지만, 그것은 매끄러운 개선이 아닌 톱니처럼 진행되는 개선이며, 때로는 오싹한 역행 사례도 있다.
나치스의 허리띠 고리에는 '신이 우리와 함께'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유대인이 신의 살해자라는 가르침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따라서 단지 신의 복수하는 손 역할을 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양심의 가책 없이 절멸을 시도할 수 있었다. 잔인하지 않게 감정의 개입 없이 실행하는 한." - 존 톨랜드. <아돌프 히틀러>.
"나는 영원히 카톨릭 신자로 남을 거야." - 히틀러. 1941. 측근인 게르하르트에게.
마르틴 루터는 지독한 셈족 반대주의자였다. 보름스 종교회의에서 그는 "모든 유대인을 독일에서 축출해야 한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라는 책까지 썼는데, 히틀러는 아마 그 책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종교는 평민들을 입 다물게 하는데 아주 좋다."
- 나폴레옹.
"종교는 평민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들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 세네카.
히틀러가 단독으로 잔학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 끔찍한 행위들 자체는 병사들과 장교들이 저질렀고, 그들 대다수는 기독교인이었다.
어느 쪽이든 히틀러의 악행이 무신론으로부터 나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종교전쟁은 역사에서 끔찍할 만큼 자주 일어났다. 무신론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이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일어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전쟁은 경제적 탐욕, 정치적 야심, 인종적 편견, 깊은 슬픔이나 복수, 국가의 운명에 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신념 등이 동기가 될 수 있다.
전쟁의 동기로 더 설득력 있는 것은 자신의 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고, 모든 이단자들과 경쟁 종교의 추종자들은 죽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신의 병사들은 순교자의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명확히 약속하는 경전의 뒷받침을 받는 흔들림 없는 신앙이다.
"종교의 위험은 그것이 없었다면 정상적일 사람들을 광기로 내몰고 광기를 신성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종교적 주장들은 정당화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아이들이 배우기 때문에, 문명은 여전히 얼토당토않은 무리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고대 문헌 때문에 자살하고 있다. 그토록 비극적으로 불합리한 일이 가능하리라고 누가 과연 생각했겠는가?"
- 샘 해리스. <신앙의 끝>.
반대로 믿음의 부재를 위해 전쟁에 나갈 사람은 과연 있을까?
08.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종교는 매 순간 당신을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이 해선 안 될 열 가지 목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그 열 가지 중 하나라도 하면, 그는 영원히 고통을 주는 곳으로 당신을 보내어 울부짖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신을 사랑한다!" - 조지 칼린.
우리가 도덕적이 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근본주의자에게 신성한 책의 진리는 추론 과정의 최종 산물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다.
만일 증거가 그것과 모순되는 듯하면 버려야 할 것은 그 책이 아니라 증거다.
과학자가 믿는 것은 신성한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증거가 진화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진화를 믿으며, 그것을 반증하는 새 증거가 나오면 단번에 그것을 버릴 것이다.
진짜 근본주의자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와 열정을 혼동하기가 아주 쉽다는 것이다.
옥스퍼드大 동물학과에 재직 중이던 노학자는 오랜 세월 골지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믿었고 그렇게 가르쳤다.
어느 날 미국의 세포학자의 초청강연이 끝나자 노학자는 연단으로 올라가 연사와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친애하는 동료여,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손이 빨개지도록 박수를 쳤다. 근본주의자는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과학자로서 나는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그것이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바꾸지 말고,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킨다.
근본주의 종교는 수많은 순진하고 선량하고 열의가 있는 젊은이들의 과학 교육을 망치려고 필사적이다.
"재림이 임박했으므로 우리는 환경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
- 제임스 와트. 레이건 행정부의 내무장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미국 탈레반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전을 글자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惡은 사람들에게 나쁜 결과를 낳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도 다수가 사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뜻한다.
→ 동성애, 낙태...
배아를 죽이는 것에 열렬히 반대하는 상당수가 어른을 죽이는 행위에는 열광하는 듯이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 조지 부시.
자신들을 받아들인 국가의 민주적으로 제정된 법이 아니라, 오직 이슬람법의 적용만을 받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영국의 이슬람교도...
베토벤 오류 - "아버지는 매독 환자이고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다. 이미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첫째는 맹인이었고, 둘째는 사산했고, 셋째는 농아였고, 넷째는 결핵에 걸렸다. 당신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임신중절을 시켰겠지요."....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을 살해한 겁니다."
사실 베토벤은 장남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둘째지만, 첫째가 유아 때 죽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낙태를 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1888년에 히틀러가 태어났다."
부드럽고 온건한 종교도 극단주의가 자연스럽게 번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는데 일조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마치 테러가 자체 의지와 정신을 갖춘 영혼이나 힘인 양 묘사한다.
정치가들은 테러리스트들의 동기가 순수한 악에서 비롯된다고 규정짓는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동기는 낙태수술을 한 의사를 살해한 기독교인처럼, 스스로 올바르다고 인식하는 것, 자신의 종교가 말하는 것을 추구하려는데 있다.
그들은 정신이상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종교적 이상주의자다.
요람에서부터 철저하고 의문 없는 신앙을 갖도록 양육되었기 때문이다.
"준비되었나? 내일, 너희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일을 놀리는 대신에 목을 바치지 않는가? 왜 당신은 자살임무에 나서서 천국으로 직행하지 않는가?
"불합리한 것을 당신이 믿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에게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도 할 수 있다."
- 볼테르.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죽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 버트란드 러셀.
온건한 종교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는 극단적이지 않아도 극단주의로 이어지는 공개 초청장이 된다.
조국애나 민족애에도 나름대로 극단주의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합리적인 계산을 침묵시키는데 특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다른 모든 것들을 침묵시키는 계산 말이다. 그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며 순교자의 천국은 특히 영광스럽다는, 속기 쉬운 약속 때문이 아닐까?
사건이 터지면, 성직자들과 사회지도자들은 죽 나서서 극단주의가 진정한 신앙의 왜곡된 형태임을 설명하면서, 사건과의 관계를 부인할 것이다.
경전은 이것저것 뒤섞인 잡탕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로운 구절들을 찾아낼 수 있다. 전쟁을 원한다면 호전적인 구절들을 찾아낼 수 있다.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신앙은 아주 위험하며, 그것을 순진한 아이의 취약한 정신에 계획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몹시 잘못된 일이다.
09. 종교로부터의 도피;
"모든 마을에는 횃불이 있다. 바로 교사다. 그리고 그 횃불을 끄는 사람이 있다. 성직자가 그렇다."
- 빅토르 위고.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제들의 위선...
돈독 오른 변호사들의 부추김을 받았을 때 정신이 거짓으로 꾸며 내는 놀라운 능력...
나는 사제가 고해성사를 하지 않은 죄인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을 믿도록 아이들을 부추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동학대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