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제주도 화전민 사건, 제주도 4.3 사건 , T764

사회 Society

by 진보남북통일 2024. 5. 29. 12:45

본문

 

제주도 화전민 사건, 제주도 4.3 사건 

제주도 화전민 가운데 당시에 목장지대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제활동으로 꽤나 돈을 번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원읍 한남리 굴치화전에 살았던 현씨 일가가 그렇습니다.

 

남편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표고장에서 책임자로 근무했고,

아내는 수십 마리 소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제주4.3 때 무장대가 와서 소를 끌고 가버렸습니다.

억울한 아내가 소를 되찾기 위해 무장대 주둔지로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

화전민 소 끌고 간 무장대, 되돌려 받으려고 간 어머니는 결국..

 

굴치화전은 수망리 민오름의 서남쪽 1635-3번지에 있던 화전 터다. ‘머체왓숲길’ 동쪽 내 넘어 한남리‧남원리 공동목장에 속하는 ‘막지슨동산’, ‘밤낭밭’에 오르면 과거 오봉진이란 사람이 소유했던 땅이 있다. 오봉진의 아들 오면하는 1930년대 마을공동목장에 자신의 땅을 기부하여, 목장 조성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이 시기를 전후로 남원리 상동(버너리굴)에 사는 현 씨 집안이 목장 위 끝자락 1635-3 번지로 들어와 살았다. 남원리에 거주하는 현〇능은 선대가 소려니오름 북동 1시방향 1.4km 인근 ‘궤영곶’란 곳에 살았고 이곳에 할아버지 산소가 있었다고 전했다. 할아버지는 그 곳에 살았고, 훗날 산소는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고 말했다. 최초의 선대는 남원리 상동에서 ‘궤영곶’으로 올라와 살았으며 농사도 지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선대에 먼저 ‘궤영곶’ 화전에 거주하다가 남원리 상동으로 내려갔는데, 그의 아들 현〇침이 다시 굴치화전으로 올라와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술자도 굴치화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송 씨다.


구슬자 현〇능은 집에서 서쪽에 있는 소낭당내(서중천으로 잘못 불리는)의 ‘한냇도’를 건너 ‘거린오름앞밭’(한남리 산 69번지 일원)을 지나면 거린오름과 다래오름(거인악 또는, 큰거린오름으로 잘못 불리는 오름)이 있었는데, 그 서쪽을 지나서 ‘눈시끔’(다래오름 10시 방향 1.3km지점 삼거리)으로 가면 표고밭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표고장에서 표고버섯 생산을 총괄하는 ‘센도’(총감독을 이름)로 일했다. 일본인 사장은 제주시에 살았는데, 사장은 표고장으로 올 때 가마니로 쌀을 가져왔다. 사장이 방문하는 날이면 흰쌀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종종 남동생 손을 잡고 아버지가 일하는 곳으로 다녀왔다고 한다.

▲ 굴치화전 1967년 항공사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어머니 송 씨는 ‘거린오름앞밭’, ‘반득이왓’(민오름 남쪽 한남리 산 84번지) 인근 넓은 초지에 한남리 등 주변 마을에서 사람을 빌어 촐(띠)를 베어내기도 했는데, 이는 표고밭 일만 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목축에 필요한 일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쇠막을 갖추고 목축을 했기에 겨울 준비도 홀로 해야만 했다.

모친은 자신에게 소 먹이는 것을 포함에 여러 일을 시켰기에 시간이 날 때면 집 뒤 폭낭(팽나무)에 올라 다니든지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가 일부러 자고 오기도 했다. 폭낭은 접꾼(일꾼)을 빌어 일할 때도 일꾼들이 쉼터였다.

접꾼을 빌리면 메밀을 갈아 상애떡을 대접하고, 쉰다리를 만들어 간식으로 줬다. 접꾼은 대게 한남리, 의귀리 사람들이었다. 아버지가 표고 일을 하고 소를 20-30마리를 키우는 부자였기에 쌀밥(일본인이 남편에게 가져온 쌀로)을 해주면 일꾼들이 좋아했다 한다. 모친이 일꾼을 빌린다고 하면 마을에선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올라왔다. 집은 안채, 바깥채, 쇠막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소들은 ‘소낭당내’의 물을 마셨다.

집에 불이 꺼지면 동생과 함께 수망리 장구못화전이나 머체왓화전으로 가 불을 빌려오기도 했다. 불을 빌리러 가면 불 빌리러 왔다며 다른 동네 화전 아이들의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불을 가지고 올 때는 ‘불찍’ 통에 담아 왔다는데 부친이 물오름(동수악으로 잘못 불리는 오름) 쪽으로 가서 종나무나 팽나무 썩은 속을 구해와 집에 모아두다 팔기도 했다고 한다. 굴치는 머체왓화전이나 장구못화전 등으로 이동하고 목축하는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이어서 ‘불찍’을 사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 굴치화전에 있었던 쇠막으로 추정되는 장소. 거기에서 하얀 사발도 발견됐다.(사진=한상봉)

------------------
한남리 고〇숙(1937생)은 자신의 어머니 생전에 화전 사람들은 농사가 안 되는 화전지를 피해 한남리 ‘고궤왓’에 밭을 사 갈아먹었다고 한다. 고궤왓에 땅을 샀던 화전은 굴치 송 씨로 땅 면적은 약 3,800여 평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보리가 잘 자라는 밭이었는데, 훗날 이 땅을 자신이 다시 구입했다는 것이다. 이로 본다면 화전 사람들이 화전 아래쪽 마을에 땅을 사두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신례리 이생이(이승악)오름 화전에서도 보이는 현상이다.

모든 화전이 그랬듯이 제주4‧3으로 굴치왓화전은 큰 위기를 맞았다. 화전으로 들이닥친 무장대는 현 씨의 집에는 오질 않고 들판의 소를 끌고 가버렸다. 어머니 송 씨는 무장대가 주둔하던 장구못화전으로 찾아가 소를 돌려달라고 따졌다. 그런데 “안 돌아가면 죽인다”라는 무장대의 겁박에 빈손으로 돌아야와 했다. 어머니 송 씨의 얘기로 무장대는 마은니오름 주변에 살았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