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장 씨는 1940년[6] 평안북도 신의주시 출신 실향민으로, 어릴 적에 월남했다고 한다. 1964년, 해병대 제대 이후[7] 대구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한 장애아를 데려다가 기른 것을 시작으로
미혼 상태로 정관수술을 한 뒤 점차 장애아를 한두 명씩 모아다 기르게 되었고,
(의견; 정관수술은 여자 아이들 강간을위해서 했을까? 아니면 왜? 정관수술을?)
1970년경부터 서울특별시 영등포구(현 강서구)[8] 방화1동 249-45 공터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터를 잡다가
1973년부터[9] 어머니가 사들인 내발산동 419-1번지의 야산 인근에 있는 폐가를 개조하여 정착한 뒤 장애아를 돌보면서 주로 미국 등지로 몇 차례 부흥회를 다니거나 흑염소를 키워 육골즙을 만드는 등 생계 활동을 해오다가
1979년 이후 수 차례 언론을 타면서 유명세가 더해졌고 사랑의 집을 후원하는 후원자들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10] 심지어
1988년에 자서전 <주님의 손처럼 되고 싶어라>도 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경부터 사랑의 집 일대 토지가 서울 남부지역 개발 붐으로 땅값이 올라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고 장 씨도 사랑의 집 증축을 위해 땅을 측량하다가 사랑의 집 인근 땅에 남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후 갑자기 나타난 땅 주인들과 갈등을 겪다 땅 주인들이 경찰에 고발하는 바람에 장 씨는
1986년에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의해 연행되어 잡혀들어가 조사를 받은 후 땅 주인들에 의해 온갖 방해와 협박을 당하다
1989년에는 전술한 자서전에 땅 주인들 이름을 본명으로 기재하는 바람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90년에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어 돌아와 보니 내발산동 사랑의 집은 이미
1989년 10월 6일부로 강서구청의 행정대집행에 의해 철거되었고[11],
장애인들은 당시 서울시립아동병원이나 장애인 시설 등으로 보내졌다.
악마 장 씨는 이들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병원측에서 거액의 치료비 및 식비 등을 내야만 한다고 하자 결국 주머니 사정상 5명의 장애인들을 겨우 찾아 지리산, 월악산 등지를 떠돌면서 약초를 캐며 원시인과 다름없이 유랑생활을 하다가[12]
1996년경에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용암리 산골에 터를 잡으며 2년 뒤에 새 집이 지어지자 이곳으로 정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