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태어난 계절은 분명 겨울은 아니다. 예수 탄생 소식을 처음 접한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는 기록(누가복음 2:8-10)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 예수의 탄생일은 밖에서 양을 칠 수 있을 만한 계절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스라엘 기후는 밤에 기온 편차가 큰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성경에는 예수의 탄생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만약 구체적인 시와 날짜가 있었다면 더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와 관련된 모든 것은 신성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나 성의, 최후의 만찬에 섰던 성배 그리고 구약시대 법궤가 실존한다면 유물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지나치게 신성시한 나머지 전쟁도 불사할 사람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은 감추어질수록 좋은 것이며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상상력 일뿐이다. 예수의 탄생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감추어질수록 좋은 것이 있다.
그렇다면 왜 성탄일인 '크리스마스'의 날짜가 겨울인 '12월 25일'이 되었을까?
이 날짜를 예수의 탄생일로 정한 이유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설은 로마에서 동지에 행해졌던 축제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지녔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12월 24일~다음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다.
본래 로마에서는 하루 해가 가장 짧았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농경신인 사투른(Saturn)과 태양신인 미트라(Mitra)를 숭배하는 축제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뒤 로마의 교회는 이교도들의 전통적인 축제일을 예수의 탄생일과 동일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드리면서 이교도들의 풍습을 없애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축제일을 인정하면서 화해와 연합, 이해와 용납의 의미로 동지절을 성탄절로 만든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려는 정책이기도 했다.
당시 미트라숭배와 사투르날리아(Saturnalia)가 매우 광범위하게 대중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때문에 그 풍습을 억압하는 대신 동화시키는 방법을 사용, 태양의 재탄생에 비유하여 '세상의 빛'인 예수의 탄생을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런 입장은 점차 널리 퍼져갔으며,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한 대항논리를 정교화시키는 가운데 강화되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부터다. 고대 로마 교회에서 기원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시작한 연대에 대해서는 335년 설과 354년 설이 있다.
'성탄일'은 그 후 동방 교회로 퍼져나가 '콘스탄티노롤리스'(379년), '카파도기아'(382년)등에서 지키기 시작했고, 교회력의 기원이 되어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시력 기원인 B.C와 A.D의 시원이 되었다. 로마의 액시그누스(500~544년)가 533년 부활절 표를 작성할 때 계산한 데서 비롯된 시력기원의 기점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만들어 졌는데 계산 착오로 4년이 앞당겨졌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기 전에는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켰는데 동방교회(동로마)에서는 1월 6일을 예수의 탄생과 세례를 기념하는 이중 명절로 지켰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계속 부정해 오다가 6세기 이후부터 1월 6일과 12월 25일로 분리하여 경축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아르메니아 지방의 교회에서는 1월 6일에 성탄절을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전통 때문에 1월 6일 현현일을 '작은 크리스마스(Little Christmas)' 또는 '구 크리스마스(Old Christmas)'라고도 부른다.
12세기에 이르면 크리스마스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가 되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성행하여 성니콜라스(St.Nicholas)는 선물의 상징이 되었다. 15, 16세기에는 예수의 탄생을 소재로 수많은 예술작품이 등장하게 되어 광범위하게 대중화된 양상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 청교도 및 칼뱅교도들에게 이교도의 풍습이라고 배척받았다.
또 크롬웰 치하의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제의를 행하는 것이 법으로 엄금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미국의 뉴잉글랜드지방에도 이전되어 1856년 이전에는 법정공휴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크리스마스 트리와 크리스마스 카드라는 대중적 풍습이 가미되면서 크리스마스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은 원시시대의 수목숭배와 연결시킬 수 있으나 가까이는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연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거기에서 에덴의 동산을 상징화하면서 '낙원의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연극이 탄압을 받게 된 뒤에는 집안으로 들여와 사탕, 과일, 촛불로 장식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북유럽국가들로 전파되었고, 1841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알버트공에 의하여 영국에 소개되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초 펜실베이니아지방에 이주한 독일계 정착민들에 의하여 전달되었으며, 곧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다. 불을 밝힌 크리스마스 트리를 공공장소에 놓게 된 것은 바로 미국에서부터였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현재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 때는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캐럴'이라는 말은 원래 '플루트 연주에 맞추어 추는 춤곡'이라는 의미로 밝고 경쾌하며 후렴과 반복이 행해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단순하고 율동적인 노래인 캐럴은 원래 15세기에 영국에서 황금기를 맞게 되나, 종교개혁과 뒤이은 개신교의 영향으로 캐럴의 발전이 둔화되어 미약하게 유지되어 오던 중 19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크리스마스 카드가 지금의 모습대로 등장한 것은 1843년 영국의 삽화가인 호슬리(Horsley, J.C.)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한 가족의 모습을 그려 넣고 '당신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를(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to You)'이라는 문구를 적어 런던에서 1000장을 팔았다. 1860년에는 온 영국에 퍼졌으며, 곧 미국으로 건너가 일반화되었다.
뚱뚱하고 온화하며 흰 수염의 산타클로스는 4세기 소아시아의 성자인 성 니콜라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선행을 하고 선물 주는 것으로 유명한 이 성자의 이미지는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래되었다. 그 후 초기 네덜란드 이주민들에 의하여 미국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산타할아버지 모양이 만들어진 것은 1863년 나스트(Nast, T.)라는 만화가에 의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색깔은 녹색과 붉은색이다. 겨울을 이겨낸 생명 혹은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삶은 녹색으로,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붉은색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날과 관련된 장식의 색은 이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붉은 포인세티아의 사용이나 크리스마스 화환은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양극화'라는 단어 앞에 굴복하고 있는 느낌이다. 같은 문제를 놓고 해석 방법이 다르고, 같은 길을 보고 이정표가 다르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모두가 크리스마스의 본래 정신인 화합과 연합, 용납과 이해의 자리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